조상들의 여름 필수품 부채의 역사

소품집

곧 다가올 폭염에 대해 걱정이 느는 하루하루 입니다.

추위와 더위에 취약한 저는 6월도 버거운데 한여름은 어떡하나 걱정이되네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폭염에 대비했는지에대해 알아볼까하는데요, 오늘은 여름나기의 필수품이였던 부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럼 포스팅 시작해볼게요!

현대시대에서는 선풍기, 에어컨도 모자라 밖에서도 시원한 바람을 쐴 수 있는 손풍기(!!)까지 나왔는데요, 현재도 존재하고 있지만, 그 시대에도 손풍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부채'인데요, 부채는 ‘부치는 채’라는 뜻으로 과거에는 귀한 물건으로 여겨져, 국교품으로 다른 나라에 수출되기도 했[습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자루는 경남 의창군 다호리에서 출토된 깃털 부채자루라고 하는데요, 이는 2000년 전의 원삼국시대의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1800년 전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깃털부채를 들고 있는 인물상이 발견되는가 하면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왕건이 즉위하자 후백제의  견훤이 축하의 선물로 공작깃털로 만든 공작선을 선물하였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삼베나 모시, 명주 등 천을 재료로 한 부채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한지의 발명과 함께 우리가 아는 부채로 발전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고려시대 때 세계 최초로 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를 의미하는 접선(접부채)을 발명해서 사용하였는데, 당시 고려의 부채 제작 수준이 최고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을 따라 고려에 왔던 송나라 문신 서긍은 고려의 여러 풍물을 보고 돌아가서 「선화봉사고려도경」 이란 책을 지었는데, 거기에다 '고려인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는데, 접었다 폈다 하는 신기한 부채를 들고 다닌다.'고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 후로 고려에 온 중국 사신들은 접선을 얻어가면 이를 귀한 보물로 여겼으며, 나중에 이를 모방하여 부채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 부채를 가리켜 '고려선'이라 불렀습니다.

고려 때 부채 기술이 우수했던 것은 대나무 한지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한지는 질기고 가벼우며 수명이 오래가는 특성을 가져 부채 종이로 쓰임이 적합했으며 대나무 또한 견고하고 잘 쪼개지는 특성으로 부채살을 만들기에 적합했습니다.

손잡이의 나무 역시 뚜렷한 사계절의 영향으로 미려한 무늬가 남겨져 있어 그 품질이 우수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우수한 재질 덕분에 고려선은 일본, 중국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단오 때마다 임금이 각 지방의 명장들을 시켜 부채를 진상케 했고, 궁에서 만든 부채를 단오날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임금으로부터 부채를 하사받은 신하들은 부채 위에 수묵화를 그리거나 시를 한 수 적어 남기기도 하였고 백선(흰 부채)으로 웃어른이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민가에서도 단오가 되면 부채를 주고 받는 풍습이 유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선물용으로도 사용되던 부채는 그 속에 명필의 글씨나 그림을 그려 선물하게 되면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요, 부채에 글씨를 쓰는 것과 관련하여 추사 김정희와 부채 장수에 대한 일화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어느 날 김정희가 외출하고 돌아오니 집에 부채 보따리가 있어 청지기에게 이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부채 장수가 부채를 팔러왔다 날이 저물어 하루 묵고 가기를 청했다고 전했다. 김정희는 이야기를 듣고는 문득 부채에 글씨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청지기에게 부채 보따리를 가져오라 해 부채에 쓰고 싶은 글귀를 써 내려갔다. 이를 본 부채 장수는 부채를 다 버리게 되었다며 슬퍼했다. 그런 부채 장수에게 김정희는 장에 가서 추사 선생이 글씨 쓴 부채라 하고 가격을 몇 곱절을 더 부르면 너도나도 사 가려고 할 것이라 귀띔해주었다. 그날 부채 장수는 순식간에 부채를 다 팔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나 속담에서 알 수 있듯 부채는 우리 조상들에게 여름철 필수품이었습니다.

 

부채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는데요, 방구부채와 앞전에 나온 접부채 이 두가지입니다.

방구 부채란 부채살에 깁이나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형의 부채로, 일명 둥근 부채라고도 하는데, 한자로는 단선또는 원선이라고 합니다.

접부채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채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부채입니다.
접부채는 접는 부채라고도 하는데, 접부채 중에는 부채살이 50살·40살·30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부채 사용에 대한 풍속도 있는데요,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둥근 부채(방구부채)는 황색을, 접부채는 백색과 흑색 두 빛깔의 것과 기름먹인 것을 좋아했습니다.

둥근 부채는 대개 집안에서 남녀가 다같이 사용하였고, 남자가 외출을 할 때는 접부채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둥근 부채는 가지고 나가지 않으며, 여러 빛깔이 있는 색선은 젊은 부녀자 또는 아이들이 사용했습니다.

무당이나 기생을 제외한 일반 부녀자들은 외출할 때 부채를 휴대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 태종 때 부녀자의 부채휴대외출을 금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고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속도 1910년 이후로는 점차 사라져가서 오늘날은 그 유풍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부채는 여름철에 바람을 일게 하는 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사용했었는데요, 특히 숯불을 피울 때나 숯불을 사용하는 다리미질을 할 때는 연중 어느 때나 사용하며, 중국인들이 고려사람들은 겨울에도 부채를 쥐고 다닌다고 그 풍속을 기록하고 있듯이 조선시대 양반들은 겨울철에도 휴대하는 풍속이 있었다고합니다.

혼례 때에는 얼굴의 눈 아래 하반부를 가리기 위한 체면용으로서 어느 계절이고 부채를 사용하였습니다.

신랑은 청색, 신부는 홍색을 사용하였으며, 상중에 있는 상주되는 이는 부채에 낙인조차 찍지 않은 흰 부채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당들이 춤을 출 때와 창우(광대)들이 무대에서 소리를 할 때, 그리고 재인(재주꾼)들이 줄 위에서 줄을 탈 때에는  항상 부채를 사용하며, 또한 가면극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 중과 양반의 역할들이 사용하였습니다.

 

 

조상들의 여름 필수품인 부채의 역사에 대해 재밋게 보셨나요?

다음은 또 다른 이야기들로 찾아뵙겠습니다 :)

오늘의 포스팅 여기까지입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